버블경제에 해당하는 글 1

근현대 경제학의 흐름 요약 #4

반응형


~지난번에 이어 70-80년대 두번 째 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


잘못 된 내용과 관련해서 댓글로 알려주시면 바로잡아 놓겠습니다 ~







신자유주의와 통화주의

 

  정리하자면 신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로의 회귀를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작은 정부의 역할을 중요시한다. 마가렛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들고 나온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배경에는 한 때 시대를 풍미했던 케인즈의 유효수효이론의 실패가 있다. 케인즈의 이론을 따랐던 국가들의 재정은 파탄 직전까지 갔으며, 경제학에서 이를 비판하고 나온 것이 시카고학파의 통화주의(Monetarism)

  통화주의는 케인즈의 총수요 관리를 통한 경제 발전이 아닌 통화량의 조정을 통한 화폐 중심의 경제 발전을 말한다. 통화주의는 화폐를 공급하는 정부 혹은 은행이 가장 중요한데, 규칙에 따른 최소한의 정부역할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경제정책에 작은 정부의 역할이 설정되었고 결국 다음 세대의 경제흐름을 이끌어 나갔다.

 




그림 1, 2, 3, 4. 신자유주의와 경제와 관련되어 함께 보면 도움될 정리 자료

출처 : http://news.donga.com/3/all/20080901/8624938/1



일본의 경제성장과 버블경제 (Feat, 플라자 합의)

 

  1980년대 경제에서 일본의 경제성장과 버블경제를 빼 놓을 수 없다.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무조건적인 패배로 끝난 뒤 일본은 미국에게 붙어 지원을 약속 받는다. 특히 1951년 미일상호방위조약으로 일본의 군수산업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투자했으며, 이 파급효과가 다른 산업에도 미쳐 연평균 10%의 고성장을 이뤄냈다. 더욱이 1960년대에 들어서 올림픽을 개최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게 되어 경제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 오일 쇼크로 타격을 받긴 했으나 여타 다른 경제 선진국보다는 그 피해가 적었으며 일본산 차량들이 연비가 좋다는 것이 알려져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수출이 가파르게 늘어났다. 50년부터 80년까지 약 30년간을 꾸준하게 경제성장을 이룩한 일본은 미국의 경제규모를 바로 뒤따랐다. 이 와중에 미국이 70년대 두 번의 오일쇼크와 경제 정책 실패로 흔들리자 일본은 80년대에 접어들어 성공적인 경제 성장모델로 손꼽혔다.





그림 5. 일본 경제가 주도할 당시 세계 기업 순위 (시가총액 기준)

살펴보면 대부분의 기업들이 일본 자회사 기업들이다. 그나마 명맥을 글로벌 기업으로 명맥을 유지 했던 기업들은 IBM, 액손 들 뿐이었다.

출처 : https://mirror.enha.kr/wiki/1980%EB%85%84%EB%8C%80%20%EC%9D%BC%EB%B3%B8%20%EA%B1%B0%ED%92%88%EA%B2%BD%EC%A0%9C




  1979년 미국이 통화량 억제를 위해 고금리정책으로 두 자릿수 금리를 내세웠으며 전 세계 자금이 미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 일본은 꾸준한 경제성장을 이어나가기 위해 엔을 저평가하는 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 엔화가 평가절하 되면서 최고 1달러 = 250엔까지 떨어졌으며 일본의 수출업체들은 어마무시한 돈을 벌기 시작했다.[각주:1] 반면 미국은 고금리정책으로 달러 시장의 초호황으로 이어져 인플레이션도 정상화 되고 무역적자도 개선되는 듯 보였으나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다시 금리를 하락시키며 무역적자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달러 위기를 막고자 G5 경제선진국들이 모여 합의를 하게 된다. 이게 바로 플라자 합의[각주:2].



그림 6. 각 패권국가별 플라자 합의 요약 설명

출처 : http://supavista.egloos.com/v/2223781



플라자 합의의 주요 내용은 달러위기를 막기 위해 달러가치를 하락하고 엔화와 독일의 마르크화를 평가절상 시키는 것이다. 플라자 합의가 발표되자 주식시장은 즉각 변동을 보였으며 1년 뒤 엔화는 1달러 = 120엔 까지 올라갔다. 일본은 엔고현상에 의한 경제 고성장이 꺾이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위기를 극복하고자 그 해결책으로 저금리를 펼쳤다. 금리를 낮춰 저축억제를 시켰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자금이 일본은행으로 들어왔고, 은행은 대출기준을 완화하여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거액의 대출금들은 기업으로 재투자됐으며 시장에 흘러들어온 막대한 자금의 흐름은 이미 포화된 시장이 아닌 새로운 시장을 찾게 되었고 그 결과 주식과 부동산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주식시장의 거품은 어마어마했다.[각주:3] 기업들이 재테크로써 주식에 뛰어들었고 막대한 자금 흐름이 유입되면서 주식시장의 크기가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기업들은 영업이익이나 개발에 신경 쓰지 않고 당기순이익에만 집중했으며 그 결과 부실기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버블 안에서는 모두가 돈을 벌기 때문에 그 사실은 외면당했다. 또한 부동산의 거품도 빼놓을 수 없다. 주식시장의 버블과 성장으로 인해 포화상태에 이르자 새로운 투자처인 부동산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당시 시대 상황도 동부유럽권의 몰락과 미국경제의 위기가 겹치자 세계 자본 또한 일본으로 흘러 들어왔다. 상황이 이쯤 되자 부동산 불패라는 말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사 놓기만 하면 오르는 땅 값 탓에 일본 은행은 더 많은 토지담보대출[각주:4]을 실시해줬고 시중에는 도교 땅을 다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각주:5]






그림 7. 버블경제와 붕괴 당시 일본 니케이 지수 변동 그래프

출처 : 그림 안 및 http://www.bbc.com/news/business-19948730


  신기하게도 당시 일본 경제가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면서도 인플레이션은 심하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일본은 이런 선순환이 계속 이어 질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고 돈 쓸 곳이 없어 사치품을 구매하거나 외국의 땅과 미술품을 사들이는 등의 호화로운 소비생활이 이어졌다[각주:6]. 그리고 이 허황된 꿈과 생활은 199011일을 기점으로 막을 내렸다. 주식은 1년 사이 반이하로 떨어졌으며 거품 낀 땅 값과 주식 시장 탓에 일본에 투자하던 자금 흐름이 멈췄다. 그 결과 자산가격이 붕괴하기 시작했으며 소비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각종 부정부패가 표면으로 들어났다. 대출을 갚지 못한 사람들이 늘어나자 은행은 도산했고 부실했던 기업들도 망하면서 일본은 깊은 경제침체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잃어버린 10년의 시작이었다.

  1. 일본이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있을 때, 세계 기업순위를 살펴보면 시가 총액 기준 50대 기업 중 33개가 일본기업이었으며 상위 20대 기업 중 일본기업이 아닌 기업은 4개 기업 (IBM, Exxon, Royal Dutch Shell, G.E) 뿐이었다. [본문으로]
  2. 당시 경제를 주도하던 다섯 국가 (프랑스, 서독, 영국, 미국, 일본)의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들이 미국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서 환율에 관련한 합의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3. 당시 일본 주식시장의 거품을 쉽게 이해해주는 한 예를 살펴보면,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NTT)를 민영화하여 주식시장에 내 놓자 상장 시초가가 120만 엔 이었으며, 상장 후 400만 엔 까지 치솟았다. [본문으로]
  4. 당시 땅 값 대비 200%에 이르는 담보 대출을 저금리에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금융권이 대출금리를 경쟁적으로 인하시켜줬었다) [본문으로]
  5. 당시 미국은 고질적인 무역수지 악화와 달러 위기 등으로 경제가 흔들렸던 반면 일본의 버블경제성장 탓에 차이가 크게 났었다. 당시 도쿄의 황거(일왕의 거처)의 가격은 켈리포니아주 땅 값과 비등했다. [본문으로]
  6. 면접비로 5만 엔을 줄 정도로 돈이 넘쳐났었다. 해외에서는 록펠러센터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사들이고 고흐나 피카소 작품을 무조건 사들였었다. 엔고현상 탓에 엔화의 가치가 상승되고 상대적으로 달러가 하락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