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출권 거래제 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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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배출권 거래제와 관련한 내용을 포스팅 하고자 합니다. :)





2015년부터 정부가 배출권거래제(Emission Trading System)을 도입·실시하는 것입니다.


나름 핫 이슈인 이 배출권 거래제가 우리나라에서 실시되는 이유를 살펴보자면,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전 정권이던 이명박 정권의 주 된 키워드가 "그린Green" 이었고 그에따라 이명박 전 태통령이 2009년도에 국제사회에 "202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BAU[각주:1]대비 30% 감축하겠다."는 성명부터입니다.


그 이후 정부는 배출권거래제를 실시하기까지 목표관리제를 통하여 기업들이 적응 할 수 있게끔 하였으며 이제 내년 2015년에 배출권 거래제를 실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지키려는 자와 개발하여 발전하려는 자 간의 다툼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기업들은 당장 내년부터 실시하는 배출권 거래제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과 산업 발전에 큰 해를 입힐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정부(환경부로 대표되는)에 많은 항의와 유예기간을 달라는 등의 협의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제껏 정부는 협상은 일절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약간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로

"배출권거래제, 대안을 만들어 주겠다." 며 협상의 여지를 들고 나온 것이죠.


관련기사 링크 

"기업,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권 구입비 2조3천억"

http://www.yonhapnews.co.kr/economy/2014/07/28/0301000000AKR20140728151400008.HTML


관련기사 링크 2 

:대안 찾는 '배출권 거래제'...연기보다는 완화?

 http://www.ytn.co.kr/_ln/0102_201407291532117836




링크된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최경환 현 경제부총리가 지난 28일 방송기자초청토론회에서 


 "국민 경제에 미치는 부담과 국제적 동향, 국제사회 약속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이른 시일 내에 대안을 낼 것" 이라고 말했다는 것인데요. 이를 두고 각계 각층은 여러 해석을 놓고 있습니다.


재계나 산업계에서는


1) 배출권 거래제 시기 조정이 아닌 배출량 조정

2) 과징금액 조정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두고 환경단체에서는 "기업이 어느 정도의 부담을 느끼지 않고는 배출권 거래제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부담을 느껴야만 관련 기술에 투자를 하고 선 순환이 이뤄질 것이다." 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사실 이런 문제에 있어 정답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온실가스와 배출권 거래제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2015년부터 시행하는 배출권 거래제와 관련해서 충분히 우리나라 산업계나 재계가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사항이라고 보고 있으며, 또 그 역량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 생각이 다를 수 있겠죠!



역시 이런문제는 2015년이 되어 개봉이 되어야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오늘 포스팅을 마무리하겠습니다~


  1. Business As usual : 지금처럼 했을 경우, 온실가스관련 화두에서는 '지금처럼 아무런 탄소감축 행동 없이 시간이 흘렀을 경우를 뜻 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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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경제학의 흐름 요약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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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이어 70-80년대 두번 째 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


잘못 된 내용과 관련해서 댓글로 알려주시면 바로잡아 놓겠습니다 ~







신자유주의와 통화주의

 

  정리하자면 신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로의 회귀를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작은 정부의 역할을 중요시한다. 마가렛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들고 나온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배경에는 한 때 시대를 풍미했던 케인즈의 유효수효이론의 실패가 있다. 케인즈의 이론을 따랐던 국가들의 재정은 파탄 직전까지 갔으며, 경제학에서 이를 비판하고 나온 것이 시카고학파의 통화주의(Monetarism)

  통화주의는 케인즈의 총수요 관리를 통한 경제 발전이 아닌 통화량의 조정을 통한 화폐 중심의 경제 발전을 말한다. 통화주의는 화폐를 공급하는 정부 혹은 은행이 가장 중요한데, 규칙에 따른 최소한의 정부역할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경제정책에 작은 정부의 역할이 설정되었고 결국 다음 세대의 경제흐름을 이끌어 나갔다.

 




그림 1, 2, 3, 4. 신자유주의와 경제와 관련되어 함께 보면 도움될 정리 자료

출처 : http://news.donga.com/3/all/20080901/8624938/1



일본의 경제성장과 버블경제 (Feat, 플라자 합의)

 

  1980년대 경제에서 일본의 경제성장과 버블경제를 빼 놓을 수 없다.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무조건적인 패배로 끝난 뒤 일본은 미국에게 붙어 지원을 약속 받는다. 특히 1951년 미일상호방위조약으로 일본의 군수산업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투자했으며, 이 파급효과가 다른 산업에도 미쳐 연평균 10%의 고성장을 이뤄냈다. 더욱이 1960년대에 들어서 올림픽을 개최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게 되어 경제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 오일 쇼크로 타격을 받긴 했으나 여타 다른 경제 선진국보다는 그 피해가 적었으며 일본산 차량들이 연비가 좋다는 것이 알려져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수출이 가파르게 늘어났다. 50년부터 80년까지 약 30년간을 꾸준하게 경제성장을 이룩한 일본은 미국의 경제규모를 바로 뒤따랐다. 이 와중에 미국이 70년대 두 번의 오일쇼크와 경제 정책 실패로 흔들리자 일본은 80년대에 접어들어 성공적인 경제 성장모델로 손꼽혔다.





그림 5. 일본 경제가 주도할 당시 세계 기업 순위 (시가총액 기준)

살펴보면 대부분의 기업들이 일본 자회사 기업들이다. 그나마 명맥을 글로벌 기업으로 명맥을 유지 했던 기업들은 IBM, 액손 들 뿐이었다.

출처 : https://mirror.enha.kr/wiki/1980%EB%85%84%EB%8C%80%20%EC%9D%BC%EB%B3%B8%20%EA%B1%B0%ED%92%88%EA%B2%BD%EC%A0%9C




  1979년 미국이 통화량 억제를 위해 고금리정책으로 두 자릿수 금리를 내세웠으며 전 세계 자금이 미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 일본은 꾸준한 경제성장을 이어나가기 위해 엔을 저평가하는 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 엔화가 평가절하 되면서 최고 1달러 = 250엔까지 떨어졌으며 일본의 수출업체들은 어마무시한 돈을 벌기 시작했다.[각주:1] 반면 미국은 고금리정책으로 달러 시장의 초호황으로 이어져 인플레이션도 정상화 되고 무역적자도 개선되는 듯 보였으나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다시 금리를 하락시키며 무역적자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달러 위기를 막고자 G5 경제선진국들이 모여 합의를 하게 된다. 이게 바로 플라자 합의[각주:2].



그림 6. 각 패권국가별 플라자 합의 요약 설명

출처 : http://supavista.egloos.com/v/2223781



플라자 합의의 주요 내용은 달러위기를 막기 위해 달러가치를 하락하고 엔화와 독일의 마르크화를 평가절상 시키는 것이다. 플라자 합의가 발표되자 주식시장은 즉각 변동을 보였으며 1년 뒤 엔화는 1달러 = 120엔 까지 올라갔다. 일본은 엔고현상에 의한 경제 고성장이 꺾이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위기를 극복하고자 그 해결책으로 저금리를 펼쳤다. 금리를 낮춰 저축억제를 시켰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자금이 일본은행으로 들어왔고, 은행은 대출기준을 완화하여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거액의 대출금들은 기업으로 재투자됐으며 시장에 흘러들어온 막대한 자금의 흐름은 이미 포화된 시장이 아닌 새로운 시장을 찾게 되었고 그 결과 주식과 부동산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주식시장의 거품은 어마어마했다.[각주:3] 기업들이 재테크로써 주식에 뛰어들었고 막대한 자금 흐름이 유입되면서 주식시장의 크기가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기업들은 영업이익이나 개발에 신경 쓰지 않고 당기순이익에만 집중했으며 그 결과 부실기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버블 안에서는 모두가 돈을 벌기 때문에 그 사실은 외면당했다. 또한 부동산의 거품도 빼놓을 수 없다. 주식시장의 버블과 성장으로 인해 포화상태에 이르자 새로운 투자처인 부동산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당시 시대 상황도 동부유럽권의 몰락과 미국경제의 위기가 겹치자 세계 자본 또한 일본으로 흘러 들어왔다. 상황이 이쯤 되자 부동산 불패라는 말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사 놓기만 하면 오르는 땅 값 탓에 일본 은행은 더 많은 토지담보대출[각주:4]을 실시해줬고 시중에는 도교 땅을 다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각주:5]






그림 7. 버블경제와 붕괴 당시 일본 니케이 지수 변동 그래프

출처 : 그림 안 및 http://www.bbc.com/news/business-19948730


  신기하게도 당시 일본 경제가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면서도 인플레이션은 심하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일본은 이런 선순환이 계속 이어 질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고 돈 쓸 곳이 없어 사치품을 구매하거나 외국의 땅과 미술품을 사들이는 등의 호화로운 소비생활이 이어졌다[각주:6]. 그리고 이 허황된 꿈과 생활은 199011일을 기점으로 막을 내렸다. 주식은 1년 사이 반이하로 떨어졌으며 거품 낀 땅 값과 주식 시장 탓에 일본에 투자하던 자금 흐름이 멈췄다. 그 결과 자산가격이 붕괴하기 시작했으며 소비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각종 부정부패가 표면으로 들어났다. 대출을 갚지 못한 사람들이 늘어나자 은행은 도산했고 부실했던 기업들도 망하면서 일본은 깊은 경제침체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잃어버린 10년의 시작이었다.

  1. 일본이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있을 때, 세계 기업순위를 살펴보면 시가 총액 기준 50대 기업 중 33개가 일본기업이었으며 상위 20대 기업 중 일본기업이 아닌 기업은 4개 기업 (IBM, Exxon, Royal Dutch Shell, G.E) 뿐이었다. [본문으로]
  2. 당시 경제를 주도하던 다섯 국가 (프랑스, 서독, 영국, 미국, 일본)의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들이 미국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서 환율에 관련한 합의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3. 당시 일본 주식시장의 거품을 쉽게 이해해주는 한 예를 살펴보면,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NTT)를 민영화하여 주식시장에 내 놓자 상장 시초가가 120만 엔 이었으며, 상장 후 400만 엔 까지 치솟았다. [본문으로]
  4. 당시 땅 값 대비 200%에 이르는 담보 대출을 저금리에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금융권이 대출금리를 경쟁적으로 인하시켜줬었다) [본문으로]
  5. 당시 미국은 고질적인 무역수지 악화와 달러 위기 등으로 경제가 흔들렸던 반면 일본의 버블경제성장 탓에 차이가 크게 났었다. 당시 도쿄의 황거(일왕의 거처)의 가격은 켈리포니아주 땅 값과 비등했다. [본문으로]
  6. 면접비로 5만 엔을 줄 정도로 돈이 넘쳐났었다. 해외에서는 록펠러센터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사들이고 고흐나 피카소 작품을 무조건 사들였었다. 엔고현상 탓에 엔화의 가치가 상승되고 상대적으로 달러가 하락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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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경제학의 흐름 요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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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아울러 함께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20여년을 아우르다보니 내용이 많아져 두편으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7,80년대 흐름의 특성상 이어져서 진행되는 부분이 많아 부득이 함께 정리해봤습니다)



첫 시작은 경제학의 흐름이었는데, 어쩌다보니 그냥 경제의 흐름으로 변모해가고 있네요.. 아무래도 정식으로 배우지 못해 논지를 바로 세우지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ㅠㅠ



1970년대 ~ 1980년대

 

오일쇼크

 

1970년대에 들어서며 ‘Pax Americana'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베트남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연방 정부의 지출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60년대 말, 일시적인 인플레이션을 막고자 세금을 올렸으나 이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더욱이 1973년 제4차 중동전쟁[각주:1]에 여파로 산유국들이 담합하여 가격인상과 수출량 억제를 실시한, 1차 오일쇼크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경제 강국들은 휘청거렸다


그림 1. 1946년 이후 배럴 당 원유가격 추이

파란색 실선은 2013년 USD로 조정한 가격, 아랍산유국의 담합과 Embargo(통상금지책)으로 인한 원유가 상승

출처 : http://www.ibtimes.com/four-decades-after-arab-oil-embargo-us-outperforms-saudi-arabia-how-1973-crisis-changed-us-energy


그림 2. 1973년 오일 쇼크 때 New York City, Brooklyn 의 모습

1973년 오일 쇼크로 인해 대부분의 차가 움직이지 못할 정도 였으며, 경제적 타격 또한 컸다.

출처 : http://artnectar.com/2010/02/1970s-new-york-city-in-pictures/


스태그플래이션[각주:2]으로 인해 실업률은 증가하기 시작했고, 사회보장제도 탓에 실직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면서 스태그플레이션은 악화되었다. 1977년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당선되며 경제의 악순환을 타파하고자 정부 지출을 늘리는 등의 정책을 펼쳤으나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또한 1979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각주:3]가 통화 공급을 단속하기 시작했고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며 경제는 기나긴 침체 속으로 빠져들었다.[각주:4]


  오일쇼크는 미국 뿐 아니라 서유럽국가에도 큰 타격을 입혔으며 영국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당시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셜플랜에 의한 경제 부흥정책을 통하여 경제성장을 이룩하려 노력하였으나, 유독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성과가 미비했다. 또한 큰 정부의 역할을 중시했던 경제 정책들은 근로자들의 잦은 파업과 과도한 복지를 가져왔으며 그로 인한 재정 악화, 근로의욕 저하 등 소위 영국병이라고 불리는 고비용·저효율의 경제구조에 신음했다.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시장경제 원리를 중시하는 경제 전 부분을 뜯어 고치는 개혁이 필요했고, 1979년 때마침 마가렛 대처가 영국에 등장했다.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

 

사실 마가렛 대처의 등장 전 영국은 고비용·저효율의 경제구조가 팽배했었다. 해가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에게는 빛바랜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었으며 각종 부정부패와 식민지 산업 실패, 무역 적자 등에 시달렸고 더욱이 요람에서 무덤까지책임지는 큰 정부의 복지정책은 사람들에게 필요이상으로 복지를 제공해줌으로써 영국병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당시 경제 수치를 살펴보면 실업률 15%, 인플레이션 24.2%[각주:5] 이었으며 이는 영국 경제와 사회의 어려웠던 상황을 잘 말해준다.

그림 3. 영국의 인플레이션과  GDP성장률

마가렛 대처 집권 시기와 맞물려 인플레이션이 급속도로 안정화 되는 양상을 보인다.

출처 : 그림 안에 표기

 
  마가렛 대처는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했다이 방법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며 신자유주의 이론에 입각한 정책을 내세웠다. 이 대처리즘의 경제·사회정책은 신자유주의에 입각하여 만들어 졌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는 시장원리 준수, 자유경쟁 촉진, 정부규제 철폐, 기업구조 조정, 공공재 폐지, 금융 개혁[각주:6] 등을 주장하는 새로운 경제사상을 말한다. 그 특징으로는 자유경쟁의 촉진, 극대의 효율성 추구, 이윤의 극대화, 시장경제원리의 준수, 규제 철폐, 기업의 경쟁적 우위 확보, 공기업의 민영화, 노동시장의 유연성 촉진, 실질임금의 하향 경직성 제거, 공공지출 축소, 중앙집권 지양, 정부기구 및 기업구조 조정, 사회복지부문에 대한 공공예산 삭감, 공공재의 개념 철폐 등이 있다. 이는 과거의 자유주의 즉, 고전적 자유주의[각주:7]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1979년 철의 여인[각주:8]이라고 불렸던 마가렛 대처는 대처리즘을 통해 영국을 개혁했으며 이를 통해 다시금 강국으로 변모하는 계기를 다졌다.

  

  대처리즘을 통한 개혁을 했던 그 시대에 미국은 깊은 경제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다. 결국 미국의 여론은 지미 카터를 낙선시키고 헐리우드 출신 켈리포니아주지사 로널드 레이건의 손을 들었다. 레이건은 지금까지의 경제흐름은 잘못되었으며 시장중심의 경제 정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정부 지출의 축소 세율 감소 정부 규제 축소 화폐 공급량 조절의 정책인 레이거노믹스 정책을 통해 미국 경제 변혁을 단행했다. 물론 세율을 감소시킴으로써 연방정부의 적자는 임기 초기 대비 3배나 증가한 2210억 달러(1986)로 최고점을 갱신한다. 그러나 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통해 금리를 조정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시키는 등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나간다.[각주:9] 


그림 4. 레이거노믹스 표 정리

레이거노믹스로 인한 후대의 평가는 엇갈려 있다.

출처 : http://mydaum00.tistory.com/entry/40%EB%8C%80-%EB%A1%9C%EB%84%90%EB%93%9C-%EB%A0%88%EC%9D%B4%EA%B1%B4-%EB%8C%80%ED%86%B5%EB%A0%B9%EA%B0%95%EA%B2%BD%EB%B3%B4%EC%88%98%EC%9E%84%EC%97%90%EB%8F%84-%EB%AF%B8%EA%B5%AD%EC%9D%B8%EC%97%90%EA%B2%8C-%EB%86%92%EC%9D%80-%EC%9D%B8%EA%B8%B0%EB%A0%88%EC%9D%B4%EA%B1%B0%EB%85%B8%EB%AF%B9%EC%8A%A4Reaganomics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미국은 경제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Pax Americana‘의 모습은 보이지 못했다. 빠르게 성장한 아시아 시장은 미국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으며, 미국을 꾸준하게 따라온 일본이 미국을 앞서면서 미국 대신의 경제성장 대안 모델로 떠올랐다.

  1. 제1차 중동전쟁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 건국이후 아랍연맹은 전쟁을 실시했고, 민간인들의 들고 일어서 어렵사리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지켜냈으며, 그 사이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완벽한 독립을 일궈냈다. 이후 4차 중동전쟁까지 네 번의 전쟁이 발발한다. [본문으로]
  2. Stagnation(경기 후퇴)와 Inflation(물가 상승)의 합성어. [본문으로]
  3. Federal Reserve System : Board of Governors 현재 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연방제도이사회 [본문으로]
  4. 사실상 통화 공급을 줄이는 것은 큰 정부의 역할과는 상반되는 정책이다. 또한 통화 공급이 줄어듦과 동시에 경제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소비 축소 등이 일어나기마련이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통화 공급을 통해 발생한 스태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정책이며, 미국은 통화 공급 억제책 이후 침체에 빠지나 그와 동시에 인플레이션을 낮추고 경제발전을 위한 초석을 다듬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본문으로]
  5. 연이은 경제정책 실패와 오일쇼크로 인해 타격입은 영국 경제 뒤에는 강력한 노조가 버티고 있었다.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높은 임금을 이끌어 냈으며 더 어려워진 경제사정은 결과적으로 1976년 IMF 체제를 불러왔다. [본문으로]
  6. 마가렛 대처는 1986년, 부패로 얼룩져 약화될 때로 된 금융을 세계시장에 개방한다. 그러나 무작정 개방한 것이 아닌 정부의 지원을 기초로 했으며, 영국의 금융회사들은 이를 통해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으로 발돋움 한다. [본문으로]
  7. 고전적 자유주의는 국가의 최소화를 통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이념이다. 즉, 작고 강한 정부의 개념이다. [본문으로]
  8. 사실 철의 여인은 소련정부가 마가렛 대처의 철혈정책을 비판하고 인성을 깎아 내리기 위해 사용한 별명이었으나 그녀가 이 별명을 마음에 들어 하여 영국 언론에서도 사용하였다. [본문으로]
  9. 이 시기부터 FRB는 경제의 교통경찰의 역할이 되어 이끌어 나갔으며 경제부분에 있어서 대통령보다 힘이 강력한 기관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앨런 그린스펀이 있다. 앨런 그린스펀은 약 20년간 이사회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의장재임시절 닷컴 붕괴 등의 경제위기를 잘 대처했다고 칭송받지만,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정책을 너무 지지한 탓에 부동산 버블로 이어지게 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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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인 취소인증(Attestation of Voluntary Cancellation)에 대해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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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자발적인 취소인증(Attestation of Voluntary Cancellation)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온실가스와 관련해서 공부를 하고 있거나, 일을 하고 계시는 분들은 모두 


UNFCCC(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UNFCC에서 2012년 9월에 자발적인 취소 인증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고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간략해서 설명하자면,


인증된 CDM 사업에서 발생된 CER을 구매하여 사용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없애버리는 활동입니다.


즉, CER을 구매하여 이용하지 않고 취소하여 온실가스를 줄이는 자발적인 행동이죠!


굉장히 뜻 깊은 행동이라고 생각 됩니다. :)






우리나라에서도 이 자발적인 취소인증을 하고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착한탄소기금 준비위원회를 들 수 있습니다. :)


착한탄소기금 준비위원회는 지난 2013년 4월 3일, 제1차 탄소배출권 소각행사를 실시 한 적이 있습니다. 

지역난방공사와 함께한 이 행사에서 지역난방공사는 공사가 소유한 탄소배출권(온실가스 배출권리)을 시민들의 기부로 이루어진 ‘착한탄소기금’에 판매하여 배출권을 영구 소각시키고, 배출권 판매로 획득한 수익금을 환경운동단체에 재기부하여 지구 온난화를 방지하는 활동에 사용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뜻 깊은 행사라고 생각합니다.


이날 소각한 탄소배출권 총 량은 1859톤!


사진 출처  http://www.greened.kr/news/articleView.html?idxno=7819





뒤이어 착한탄소기금 준비위원회는 올해 6월 25일 


뜻 깊은 행사를 또 열었습니다. 


탄소기금펀드로 모은 170여 만원을 들여 지난번 함께한 난방공사에 지급하고 배출권을 사들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총 1만 톤!  을 소각하였습니다.


사진 출처 http://www.wngo.kr/sub_read.html?uid=60367&section=sc4



또한 착한탄소기금 준비위원회에 따르면


총 두 차례에 걸쳐 소각한 11,859톤으로 전 세계 소각량 795,680톤의 1.5%에 해당하는 양 이며, 


온실가스 배출권 소각량 11,859톤을 국민 1인당 배출량 14톤으로 나누면, 


우리나라 국민 약 847명이 배출한 온실가스를 줄인 셈이 된다고 합니다![각주:1]








제가 모르는 곳에서 정말 멋진 일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네요!



그래서!


이에 감명 받아 직접 UNFCCC 홈페이지에 찾아가 봤습니다








UNFCCC홈페이지는 http://www.unfccc.org 입니다.


엄청난 영어의 압박을 이겨내며 왼쪽 상단에 빨간 줄로 표시 된 CDM을 클릭!







마찬가지로 CDM Registry  를 클릭!









드디어 우리가 찾는 Voluntary Cancellation 항목이 나오는 군요!!



어줍잖은 영어 실력으로 살펴보니..


이 곳에서 구매하거나 판매를 할 수 있는 듯 했습니다.



대신 직접적인 거래가 아닌,


판매 의사와 구매 의사를 올려 둬 그 글을 확인하고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자발적으로 취소인증된 CER List를 보니 


벌써 전세계적으로 UNFCCC의 인증을 받은 총 량은



860,147 톤 이네요!  :)









우리나라도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Others 에 들어가는 국가가 아닌 당당하게 Republic of Korea 이름으로


위 그래프에 올라가는 날을 꿈 꿔 봅니다.[각주:2]




:)













  1. - See more at: http://kfem.or.kr/?p=57748#sthash.H2ybW8Zw.dpuf [본문으로]
  2. 현재 우리나라의 이름으로는 두 개가 등록되어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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